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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예술을 누릴 권리가 있다


               문 웅 (예술경영학박사,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


 


 


<동서상징연구>나 <디지털문화론> 등을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문화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일까?” 등의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은 알 것도 같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서 교과서적인 답을 찾거나, 필경 그 질문에는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아예 주눅이 든 듯하기도 한다.


마지못해 입을 여는 이는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거나 “숭고미의 체험”이라는 등 어려운 미학. 철학서적에나 나올 법한 답을 조심스레 꺼낸다. 나름대로 ‘체면’은 살려보려 하지만, 결코 확신에 찬 대답은 아니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나는 학생들을 더 이상 애태우지 않으려고 바로 답을 말해버린다. “예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면 학생들은 또 의아한 표정을 짓지만, 그 중 몇 명은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앞서 학생들이 내놓은 대답이 전적으로 틀리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근대철학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답안’이다. 하지만 그 의미와 맥락이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예컨대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얘기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전제로 한 그리스철학의 원리 자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일상을 떠난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을 반영하고 현실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생각과 가치체계, 이념 등과 관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범한 우리를 찜찜하게 만드는 무엇


“윤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역시 미적가치가 반드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절대미의 기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가치판단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과 가치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인데, 나는 이 의미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제까지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사실이라고 믿는 것,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는 일은 실제 아주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 왜 예술은 우리의 생각을 바꿔 놓으려 하는가. 예술이 그런 것이라면 없어도 되는 게 아닌가. 예술가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인가. 사실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없으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비엔날레라는 거대한 국제현대미술제를 위해 엄청난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고, 종잡기 어려운 작품들을 놓고서 ‘예술’을 감상해야하는 고역을 치루지 않아도 될 테고, 읽기 어려운 미술평론이나 미술이론들로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 과연 예술은 필요한 것인가. 과거에 그랬듯이 그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올려다보는 것을,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바라보는 것을 예술이라고 못 박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불편한 존재’였다.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적 기준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늘 교회 세력이며 귀족들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관습과 관행, 윤리에서도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다시 현대미술의 결코 부드럽지 않은 불편함을 얘기해보자. 191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을 풍미하던 다다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인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자. 남자소변기를 가져다가 거꾸로 돌려놓은 작품이다.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게 작품이야?”라고 반문할 것이다.


너무 엉뚱해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반응은 어떤 배신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에 대한 배신감 말이다. 우선 뒤샹은 작품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모름지기 작가란 위대한 작품을 위해 혼신을 불태우며 작업에 몰두,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줘야 마땅한 게 아닌가. 그럼에도 이 불성실한 작가는 변기 파는 가게에 가서 소변기하나 달랑 사와 미술관에 던져 놓았을 뿐이다. 그런 것이 예술작품이라면 예술가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예술가란 무엇이고,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마르셀 뒤샹의 ‘샘’>


예술가와 예술작품


뒤샹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그 강도가 제법 세다. 왜냐하면 불편함의 파장이 근본적인데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작품의 기준은 어디에 있고,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 뒤샹은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은 더 이상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무어라? 그럼 뭘 만들어낸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한다. 우리의 생각을 '개념적으로(conceptually)' 바꿔놓는 일이라고, 또한 시각적인 부분에 집중한 예술작품은 이제 장식적인 기능밖에 할 수 없다고, 예술가란 그런 점에서 장식적인 작품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고의 축을 바꾸기 위해 ‘개념을 던지는 자’라고…….


그래서 뒤샹은 일단 예술작품을 소변기로 선택한다. 우리에게 오랜 믿음으로 자리한 예술작품 개념이 확실히 깨지는 순간이다. 소변기는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더더욱 철학적인 것이 아니며, 종교적이라 말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는 소변기에 작가의 서명 대신 소변기 제작회사 이름인 ‘Mutt'라는 글자만 남겼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오랜 믿음으로 자리한 위대한 예술가의 신화가 여지없이 깨진다. ‘신화 깨기’, 이것은 엄청나게 심기 불편한 일이다.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사에서 ‘개념미술’의 장을 연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개념미술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현대미술이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그 핵심이 옮아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개념적인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독자들이 익히 겪은 바대로, 이제 더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예쁘게, 조각 작품을 근사하게 만드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예쁘고 근사하기는커녕 일상에서 흔히 보고 사용하는 물건들을 갖다놓질 않나, 신문이나 광고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질 않나, 고물과 폐품들을 마구 늘어놓질 않나, 도무지 예술가들은 그럴듯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샹은 작품이라는 말 대신 기성품 이라는 뜻인 ‘레디메이드(Ready Made)' 개념을 제안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그 물건(objet.오브제)을 선택한 동기에 달려있고, 나아가서는 그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해석을 내리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개념은 우리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일상에 가까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작품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걸작)’와 같은 완결된 개념이 아니라 미완의 것이며, 과정이라는 의미다. 개념적으로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 보는 대로 느끼자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현대미술, 아니 예술을 이해하는데 그 어떤 기준을 두지 말자는 말을 꺼내는가? 작품은 이제 일방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람객도 그 의미를 만들고 ‘발견’하기 위해 동참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참여해야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을 바꾸는 데 있다. 게다가 예술은 딴 세상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 안에서 삶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생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한다면 그게 어찌 나쁠 것인가. 자, 그럼 이런 관점에서 현대미술을 함께 만나보도록 하자.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불편해지자.


우리는 지금 230 여개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그들 각각의 문화예술에 대한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 도회지의 건물들도 10,000M2 이상인 건물에는 일정의 예술품을 설치하게 되어있다.



이제 우리는 바야흐로 통합, 융합, 통섭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해 우리는 자기분야만의 거의 획일적인 사고와 취향을 갖고 갇혀 산다. 음식에 편식하면 안 되듯이 학문의 편식은 물론 전공의 편시고 좋은 현상은 아니다.


이제 당신도 예술을 누릴 권리가 있다. 시간적, 지리적, 경제적 이유 등으로 문화예술을 접하기 힘든 지방 대학일수록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열린 마음으로 내 안에 감성적 정서를 안겨주기 위해서 문화예술을 알아 가야하고 그 안에서 즐길 줄 알아야한다. 혹자는 경제적인 이유만을 먼저 거론하는 이들이 있다. 비싼 값을 치루는 예술만이 예술이 아니다. 구민회관에서 열리는 무료공연도 있고 길거리 조각 작품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는 해가 지면 작은 공원이나, 마을 강당에서 아마추어 예술인들이 작은 콘서트를 자주 연다. 그런 공연 홍보를 위해서 그 지역 할머니나 학생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공연전단지를 나눠주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거리에서 받을 수 있는 전단지는 노래방, 술집, 식당 등의 광고지가 대부분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문화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말이다.



자, 현대인이여! 그대도 문화예술인의 입장에서 당당히 예술을 누리시라.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부모회, 2024년 상반기 ‘더 나눔 바자회’ 진행
한국사회적경제신문 KSEN 신현진 기자 |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관장 유영애)과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부모회(회장 윤금옥)는 4월 26일 북부복지타운 앞에서 장애인복지사업 기금 마련 및 지역후원업체의 화합의 장을 위한 ‘더 나눔 바자회’를 진행했다. 이번 바자회는 개인 및 업체로부터 물품을 수집하여 물품의 다양성을 높였고, 물품 수집부터 현장 운영까지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부모회 자원봉사단(회장 윤금옥)에서 함께 참여하며 행사에 의미를 더했다.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부모회 윤금옥 회장은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과 부모회가 함께 힘을 모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쁘고, 앞으로도 부모회 자원봉사단원들과 함께 지역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유영애 관장은 “복지관의 다양한 행사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평택북부장애인복지관 부모회 윤금옥 회장님과 회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적극적인 소통과 협업을 통해 지역주민과 함께 지역사회 장애인 복지 발전을 위해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함께 참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