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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古阜)를 뺀 동학혁명은 없다

고부(古阜)를 뺀 동학혁명은 없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의 살아온 길을 더듬어보면 영광과 긍지가 넘치는 때보다 수모와 치욕의 세월을 더 많이 겪었음을 우리는 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외적으로부터 900회가 넘는 침략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으니 선조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외침이라는 것이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과 같이 전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야 했던 큰 전쟁은 아니었지만 주로 만주일대를 장악했던 중국의 오랑캐들과 대마도를 기점으로 한 일본의 해적패들에 의한 행패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 침략행위였을 것이고 이로 인한 피해는 국경지대와 해안선 일대의 우리 백성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고난이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반도의 특성을 가져 북으로는 중국대륙과 맞닿아 있고 남으로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대치해 있다. 삼국시절에는 고구려의 번창으로 만주일대를 모두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 동북삼성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의 유적을 살피면 그 기상의 일부나마 관측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머리를 숙이는 문재인정부가 일본에게는 지나치게 꼿꼿하다. 외교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에서도 정부를 비판하는 정당과 언론을 ‘친일’프레임으로 훤자(喧藉)하여 움츠리게 만든다. 일본은 중국 못지않게 한국을 핍박했을 뿐더러 아예 조선민족을 말살시키려고 시도했다. 일본의 잔학무도한 통치에 격분한 한민족의 분노는 안중근 윤봉길 같은 애국열사의 징치로 나타났다. 지금 우리는 남북분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은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에 우뚝 선 선진국가가 되었다.

일본을 욕하고 멀리한다고 외교일등국이 되는 건 아니다. 감정적으로 매우 못마땅하더라도 영원한 벗도 원수도 없다는 외교의 진리를 떠날 수는 없다는 게 한국외교의 실력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 북한이 핵을 무기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처지다. 미국을 겨냥했다는 그들의 핵무기는 가장 손쉬운 투하처가 한국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안보 면에서 가장 중요한 우방일 수밖에 없다. 위안부나 징용노동자 문제는 안보와 상관없이 협상하는 게 순서다.

이것들을 뭉뚱거려 해결하려고 하면 갈등만 고조된다. 우리는 조선조말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외교전을 전개하면서 결국 청일전쟁의 빌미만 제공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졌다. 그것은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군을 불러드렸고 일본은 이를 기화로 무단히 파병했기 때문이다. 엉뚱한 외국 군대들이 조선 땅에서 싸웠으니 죽어나는 건 조선백성 뿐이었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의 기치는 고부접주였던 전봉준이 앞장섰다. 그의 부친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항의하다가 매를 맞고 죽었다. 그러나 전봉준이 사적인 피해자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정부는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세는 물밀듯이 조선을 뒤덮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세를 모았고 그것이 정읍과 고부를 중심으로 뭉친 동학도였다. 처음 동학접주들이 모인 곳이 무장이었고 고부에서는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고부 황토현이 주된 무대다. 기세를 올린 고부 동학도들이 이웃 정읍 장성 순창 고창 등지를 점령하며 결국 전주성까지 진출한 것은 시대의 명령이었다. 정부에서는 혼비백산하여 홍계훈을 초토사로 내려 보냈으나 동학군의 기세에 밀려 도망가기에 바빴다. 전봉준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정부의 항복을 받고 고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하여 사실상 호남일대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하여 동학혁명 발상지가 무장이라는 주장은 접주회의가 처음 열린 곳이라는 뜻이며 우리 정부에서도 자기 고향을 내세워 고부 무장 보은 삼례 등이 후보로 나왔으나 고부를 뺀 동학혁명은 없다는 결론으로 5월1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사례는 4.19혁명에서도 나타난다. 대학생으로서 맨 먼저 시위에 나선 대학은 고려대로 인식되고 있다. 4월18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14일 앞서 전북대학교에서 시위가 터졌던 사실은 까맣게 모른다. 60년 전의 지방대학의 안타까움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에 대하여 4월4일 전북대 시위를 인증하고 9명의 주동학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여 이를 공식화했다.

나는 이들을 대표하여 2021년6월 전북대 동문대상을 수여 받았다. 4.18고대데모는 널리 알려졌고 전북대4.4데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임은 국가가 인증했다. 동학접주들의 무장회합과 기포 역시 확실한 역사지만 동학혁명은 고부 황토현으로 낙착된 것과 다르지 않다. 역사는 이처럼 엇갈리는 경우도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전 대 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